@ 서예교본

제 3절 서품

완 재 2006. 8. 7. 11:59
 

제3절 書  品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송나라 전까지이다. 송나라부터는 비문이 없고 대부분이 수적(手迹)이고, 원/명/청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수만도 엄청나게 많고 성취도 대단하지만 옛말에 글씨를 배우는 사람은 당 이후의 글씨는 쓸 필요가 없고 눈으로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1) 전서(篆書)


(1), 석고문(石鼓文)  

석고문은 현재 보여지는 것으로 가장 오래 된 각석문자(刻石文字)로, 원석은 북경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다. 돌을 쪼아서 북모양으로 열 개를 만들었는데 형태가 원형이어서 갈(碣)이라 한다. 석고의 높이는 40cm에서 90cm로 서로 다르면 둘레는 평균 210cm이다. 석고마다 70자의 운문(韻文)이 새겨져 있는데, 끊임없는 자연적인 마멸과 인위적인 침삭 

으로 지금은 겨우 300자쯤이 남아 있다. 글자 모양은 아래위로 긴 것이 많고 정방형도 있는데, 결구가 뛰어나고 행간도 정리되어 있으며 횡으로도 배열이 같다. 석고문의 서법은 온화하면서도 그윽하고, 필세는 웅건하면서도 두텁고, 소박하면서도 자연미가 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은 "석고문은 서예가에 있어서 제일 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서법이다

 

 

(2), 태산각석(泰山刻石)

 이것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동쪽을 순회하면서 태산에 올라갔을 때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 등이 진나라의 덕을 칭송하면서 세운 비로 낭야대각석, 역산비(繹山碑)와 더불어 이른바 '소전기삼석'(小篆期三石)의 하나이다. 원석은 청나라 건륭 5년에 부서져 지금 열자가 남아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탁본은 송 시대에 탁본된 146자이다. 원필로서 자체가 아래위로 길며, 풍격이 혼후하고 아담하다.

 

 

 

 

2) 예 서(隸書)

(1), 예기비(禮器碑)

전체의 이름은 [노상한칙조공묘예기비(魯相韓勅造孔廟禮器碑)]로 漢나라 영수2년(156년)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곡부의 공자묘에 안치되어 있는데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서법이 가늘면서도 강하고 웅건하며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있고,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하였기 때문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맛이 있으면서도 두텁다. 자체는 납작한 것, 장방형, 아래위가 긴 것 등이 어우러져 있고, 필획이 수경하며 파책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비음(碑陰)과 비측(碑側)에 씌어진 글씨는 더욱 방자하면서도 기이하여 역대 한예의 모범이 되었으며, 청나라 어느 이는 "한나라 비문 중에서 제일"이라고 고 극찬하였다.

 

 

 

 

(2), 사신비(史晨碑)

 사신비는 하나이나 양면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이를 또한 [사신전후비(史晨前後碑)]라고도 한다. [전비]는 169년에 썼으며, [후비]는 168년에 썼으나 모두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공자묘에 있으며, 자체는 납작하며 파책은 수렴되어 있다. 결체는 아름답고 긴밀하면서도 법도가 삼엄하다. 예법이 가장 정중하게 내재된 비로서 범본이며 청나라 전예의 중흥조인 등석여가 이 사신비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3), 을영비(乙瑛碑)

 전체의 이름은 [노상을영치공묘백석졸사비(魯相乙瑛置功廟百錫卒史碑)로, 영흥 원년(153년)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곡부의 공자묘에 있다. 서법이 단정하고 근엄한 가운데 질탕하고 붓을 꺾어서 누른 필치가 드러나며,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결합시켜 굵고 가는 획을 서로 섞었으며, 파책의 꼬리 부분은 항상 크게 삐쳐서 응축되면서도 표일하고 웅건하면서도 고박한 맛을 나게 하였다.

 

 

 

 

(4), 조전비(曹全碑)

 전체의 이름은 [합양령조전비(哈陽嶺曹全碑)]로, 서기 185년에 세워졌으나 명나라 때 처음으로 출토되어 현재는 서안의 비림에 있다. 글씨는 수려하면서도 골력이 있고, 용필은 화창하여 마치 행운유수와 같으며, 풍신(風神)이 뛰어난 작품이다. 결체는 납작하며 필획이 섬세하며 파책이 날아 춤추는 듯한데 그 염미(姸美)함은 어느 것도 따르지 못한다. 한예 중에서 원필의 아름다움을 가춘 전형적인 작품이다.

 

 

 

 

(5), 장천비(張遷碑)

전체의 이름은 [곡성장탕음령장군표송(谷城長蕩陰令張君標頌)]이며, 서기 186년에 무염에 세워 졌으나 현재는 태안의 대묘(岱廟)에 있다. 서법이 순박하고 두터우면서도 강하고, 아름다우며 방정하면서도 변화가 많다. 비음은 특히 감미로워 한예의 웅건한 방필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자체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필획도 평정(平正)하다.

 

 

 

 

3) 해 서(楷書)

(1), 장맹룡비(張孟龍碑)

서기 522년에 세워진 북위의 글씨이다. 필획이 바르고 위엄이 있으며 운필이 엄근하고 결구가 엄정하여 품격이 웅강무밀(雄强茂密)하다. 특히 비액(碑額)의 글자는 예리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혼을 움직이게 한다.

 

 

 

 

(2), 정문공비(鄭文公碑)

 정도소의 글씨이다.

연대는 514년쯤으로 추정하며 운필은 방필과 원필을 병요하고 있다. 청의 포세신은 이것을 가리켜 전서의 필세와 예서의 여운과 초서의 감정이 어우러진 글씨라 평하였다.

 

 

 

(3),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구양순의 대표작으로 632년에 왕명으로 썼다.

한점, 한획에 소홀함이 없는 근엄한 글씨로 완미에 가까운

결구의 묘가 있다. 역대로 해서의 극칙(極則)으로 여겨져

왔다. 결체가 평정하고 방정한 가운데 변화의 묘가 한껏

있으며, 또한 방필과 원필을 병용하여 화려하면서도 고박한

풍격을 이루었다.

구성궁에 있는 샘에서 단물이 솟아나와 이를 기히 여긴 당태종이 구양순으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라 하였다.


 

   

(4),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안진경이 72세 때 쓴 걸작이다.

가문에 대한 기록이므로 한점, 한획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또한 안진경 글씨의 특징인 잠두서미(蠶頭鼠尾)의 극치를 이루는 것으로 "구성궁예천명"과 견주어지는 해서이다. 획이 살쪄 보이면서도 투박하지 않고, 덤덤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경지는 가히 신필(神筆)이 라 할 만하다.

 

 

 

4) 행 서(行書)

(1), 난정서(蘭亭敍)

 난정서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진다. 진(晉)나라 목제 영화9년(353) 3월 3일에 왕희지는 사안등 41명과 함께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성대한 계사를 거행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당시 나이 51세인 왕희지는 거나하게 술을 마신 뒤 잠견지(蠶繭紙)에다 서수필(鼠鬚筆) 을 사용하여 단숨에 천고의 명작이라고 알려진 [난정서]를 썼다. 전문은 모두 28행으로 전체의 글자수는 324자이다. 작품 전체가 굳세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충만 되고, 종회의 형세의 변화가 무궁하며 행서에서 볼 수 있는 기복과 변화, 강한 리듬감, 형태의 다양한 변화, 점획의 서로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 졌으며, 지영이 다시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주었다. 당 태종은 어사인 소익을 변재가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그를 속여서 [난정서]를 취한 다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에게 임모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본은 당태종의 부장물이 되었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나라때 임모본이 전해진다.

 

 


(2),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당의 승려인 회인(懷人)이 25년에 걸쳐 왕희지의 많은 필적 중에서 글씨를 모아서 성교서(聖敎序)의 원문을 마치 왕희지가 쓴 것 같이 만들어 그것을 비(碑)에 새겨 넣은 것으로 672년에 세워졌다. 글자는 모두 1900자쯤 된다.


(3), 쟁좌위(爭座位)

 안진경의 행초 작품이다. 초고(初稿)이기 때문에 더욱 꾸밈이 없으며, 그의 기상과 충절을 절로 느끼게 하는 걸작이다. 왕희지가 기조가 되기는 하나 이전의 어느 필법과도 색다른 면모는 물론 중국 서예사에 커다란 창신이요 전환점이 되었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은 왕희지와 맞먹는다.

[쟁좌위]는 안진경이 당시 복야로 있던 곽영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곽영의는 당시 환관이었던 어조은에게 아첨을 하느라고 두차례나 열린 융숭한 잔치에서 백관을 지휘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어조은의 자리를 높게 빛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곽영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엄중하게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를 "어찌 낮에 돈을 챙기는 선비와 다르랴!"라고까지 질책하였다.

 

 


 

5) 초서(草書)

 

 왕희지의 척독(尺牘) 29통 정도를 편집해서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17첩]으로 이름 붙인 것은 최초에 척독이 "17일" 운운 하는 문구로 시작되는 데에 기인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 진적(眞蹟)은 이미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 것인데, 당대 초에 관립의 학문소인 홍문관에서 학생들이 書를 배우는 교본으로 썼던 탁본이 남아 있어 진적을 상상할 수 있다. 표일(飄逸)한 가운데 장초의 신리(神理)가 보이는 생동감이 있어 역대로 초서의 범본이 되었다.

 

17첩(十七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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