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 쏘기 실기 및이론

활의 역사

완 재 2006. 10. 14. 19:29
 

2, 우리 활의 역사


0, 각궁(角弓)의 역사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각궁은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부터 발명된 활이다.목궁을 사용하던 당시 만곡궁(彎曲弓)인 각궁의 발명은 획기적인 것이며 실로 위대한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적에는 고구려의 각궁을 맥궁(貊弓)이라고 했고 한나라와 오나라 황제 등에게 고구려가 각궁인 맥궁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 인류는 원시 수렵시대에서 부터 수만 수천년동안 목궁을 사용해 왔는데 고구려가 각궁이라는 복합소재의 활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작고 가벼우면서도 저항력이 강한 고구려의 각궁은 자연속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로 만든 최상, 최고의 활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에 나오는 각궁은 오늘 우리가 쏘는 각궁의 소재와 형태가 별로 틀리지 않는다. 수렵도의 각궁은 지금의 각궁보다 장이 약간 짧은 후궁(侯弓)과 비슷하다.

이래서 우리민족은 2천년이상이나 각궁의 전통을 이어 받아 고유의 민족궁을 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활은 전쟁무기인 까닭에 역대왕조는 호국강병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활쏘기를 권장해 왔다. 하지만 활쏘기는 군사적 목적과는 달리 역대 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지도층 계급인 선비들이 심신단련과 인격도야의 방편으로도 애용되었다.

이미 공자,맹자 시대에 인자여사(仁者如射)하는 말이 나왔듯이 활쏘기는 선비들의 필수과목으로 정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있는 자들이 골프를 즐기듯이 옛 선비들은 활쏘기를 즐겼던 것이다.


이래서 활쏘기는 삼국시대 이후 군사목적 이외에도 심신단련과 인격도야를 위한 민간인들의 활동이 병행되어 왔다.

0, 민간 사정(射亭)의 역사

  민간사정이 번창하여 활쏘기가 대중화,민속화되는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이다.

서양의 조총으로 공격해 온 일본군 때문에 고전을 해온 임진왜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조임금은 전쟁이 끝나자 국민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며 경북궁안에 사정(五雲亭)을 만들어 민간인들에게 개방을 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전국각지에 민간사정이 건립되었고 서울 장안에만도 무려 48개의 민간사정이 서기에 이른다. 경기도 지방 농촌마을에까지 활쏘기 문화가 확산된 것도 이때 부터이다.선조임금은 국민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함으로써 호국정신 함양고 국민체력증진을 바랬던 것이다.


조선시대 민간사정을 중심한 활쏘기 문화는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군대의 무기체계에서 활과 노(努)를 해제하게 됨으로써 결정적으로 몰락하기에 이른다.

무과지망 젊은이들이 활을 외면하고 활쏘기는 타파되어야 할 구습으로 인식되는 시대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지방의 관영 사정들은 폐쇄되고 도시의 민간사정들이 쇠퇴 몰락하여 폐허가 되고 있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는 울적할 때마다 경희궁으로 가서 군사조련 관경을 보며 활쏘기를 즐겼다. 고종황제는 전국적으로 활쏘기 문화가 쇠퇴몰락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자 1899년에 <활이 비록 군대의 무기에서는 제외 되었다고 해도 국민의 호국정신 함양과 체력증진을 위한 활쏘기는 권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윤음(임금의 지시)을 내리게 된다. 이때 고종황제는 자신이 활을 쏘던 경희궁 안 활터에 민간사정인 황학정을 건립토록 지원한다. 고종황제의 활쏘기 권장으로 황학정이 건립되자 각지에서 폐쇄몰락했던 민간사정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다.

황학정이 전국 사정의 종가(宗家)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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