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교본

제4절 서예가

완 재 2006. 8. 7. 12:18
 

제4절 書藝家

1) 안진경(顔眞卿)

 중국 당나라(709∼785)때 사람으로 자는 청신(淸臣)이다.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며 노군공에 봉해졌으므로 안노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우고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이를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 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근례비' ,'안씨가묘비'와 행서의 '쟁좌위(爭座位)가 있다. 안진경 글씨의 품격은 웅장하고 남성적이다.


2) 왕희지(王羲之)

중국 동진(321 ~379)때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다.귀족 출신으로 세칭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른다.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데 눈부신 공을 세웠으며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며 서성(書聖)이라 칭한다.

근거에 의하면 왕희지는 어렸을 때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자라면서 오히려 재주가 뛰어나고 성격도 진솔하면서 지조와 절개가 굳었다고 한다.

특히 왕희지는 결코 옛사람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공부 하였으며 고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행서인 '난정서'가 있고, 초서에는 '17첩'이 있다.


3) 구양순(歐陽詢)

당나라때(557∼641)의 사람으로 자는 신본(信本)이다.

서예는 왕희지를 배워 그 정신의 진수를 얻었기 때문에, 무겁고 응축되고 강하다.

 특히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체가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구성궁예 천명

         

4) 동기창(董其昌)

 동기창(1555-1636)은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자는 현재(玄宰), 호는 사백(思白)이다. 1588년 진사가 되어 벼슬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같은 시기의 막시룡(莫是龍)과 함께 선종(禪宗)의 남북 분파에 의해 역대의 회화를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의 두 파로 분류하였다.


 *, 남종화

 명나라 말기에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 등이 중국의 역대 회화를 선종(禪宗)의 남북 분파에 착안해 출신 성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 2종(南北二宗)으로 구분 지은 데서 생긴 명칭이다.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높고 학식이 뛰어난 선비들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수묵이나 엷은 담채(淡彩)를 이용해 그리는 품격 높은 그림으로, 북종화(北宗畵)와 대비되는 화풍이다.

동기창과 막시룡은 남종화를 당나라의 왕유(王維)를 시조로 오대의 동원(董源)과 거연(巨然), 북송대의미불, 미우인(米友仁) 등을 거쳐 원대의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인 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과 명대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등에게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원나라 말기 이후에는 남종화가의 구도나 준법, 필법 등에 일정한 형식화가 이루어져 문인 화가가 아닌 직업 화가들도 본받아 그려서 신분상의 구분이 아닌 화법상의 구분으로 변하였다.


*, 북종화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진한 채색(彩色)과 꼼꼼한 묘사로 마치 사진처럼 외형 묘사에 주력하여 그린 장식적인 그림을 말한다.

선비 화가들이 주로 그렸던 남종화(南宗畵)와 대(對)가 되는 표현이다.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은 산수화의 화풍을 남종화와 북종화의 둘로 나누었는데, 북종화를 당나라 때의 이사훈(李思訓)과 이소도(李昭道) 부자에서 시작되어 송대(宋代)의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조백구(趙伯駒), 마원(馬遠), 하규(夏奎), 명대의 대진(戴進), 오위(吳偉), 장로(張路) 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 용어가 나오게 된 동기창의 분류 기준으로는 신분의 고하가 분류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던 듯하나, 우리 나라에 유입되어서는 신분상의 구분이기보다는 이들 화가들의 화풍을 본뜬 화풍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5) 김정희(金正喜)

 

 

  조선후기 서화가이며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서법을 엿볼 수 있는 탁본첩이다.

그는 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닦고, 1809년 동지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으로부터 서화와 금석학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에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하였고,1851년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에 9년간 유배되어 [세한도(歲寒圖)]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서체는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을 본받고, 역대 명필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6) 김 생(金生) 서첩

 

 

신라의 김생(711~?)을 「삼국사기」에서는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 등의 단정한 글씨와는 달리 김생의 글씨는 틀에 박힌 글씨를 벗어나 개성과 운치를 살리는 서체였으나 지금은 그의 글씨가 산실되어 탁본첩 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7) 원교(圓嶠) 서첩(書帖)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서화가로 정제두(鄭齊斗)에게서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이광사는 옥동(玉洞) 이서(李서1662~1723)에서 시작되어 윤두서와 윤순에게 이어진 영.정조시대 조선 고유의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의 대가이다.

 



8) 정조어필(正祖御筆)

 정조(正祖)는 조선 제22대 임금(1777~1800)으로 호는 홍재(弘齋)이며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조선 왕조 중 세종대왕에 버금하는 문화의 꽃을 피운 왕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근신을 중심으로 한 개혁과 문화의 정치를 추진했으며, 그의 서체는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의 서풍을 따르면서 엄정하고 힘 있는 필력을 보이고 있다.



 

 


 

9) 한석봉

조선 중기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 (石峰)·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천거되어 99년(선조 32) 사어(司禦)·가평군수, 1604년 흡곡현령·존숭도감 서사관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 왕희지(王蓍之)·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혔고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등에 능하였다. 특히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는데 그 필치가 뛰어나 명(明)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그의 서체는 외형의 미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나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서사정식(書寫程式)을 이룰만큼 독창적인 서풍(書風)을 확립하였으며 그로부터 사자관체(寫字官體)가 형성되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초 4대 서예가로 꼽히며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어 있을 뿐 진필로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작품에 《선죽교비(善竹橋碑)》 《기응세비(奇應世碑)》 등이 있다.

 

초 천자문

 

 

 

 

 

 

10) 정약용(丁若鏞)의 기예론(技藝論)

1. 하늘이 날짐승과 길짐승에게는 발톱과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예리한 이빨을 주었으며 여러 가지 독(毒)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어하는 것을 얻게 하고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게 하였는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유약(柔弱)하여 제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천하게 하여야 할 금수(禽獸)에게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하여야 할 인간에게는 박하게 하였는가. 이는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력이 있으므로 기예(技藝)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생각으로 미루어 아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교묘한 연구력으로 깊이 탐구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모두 아름답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예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욱 정묘(精妙)하게 마련이고, 세대가 흘러갈수록 더욱 발전하는바, 이는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공장이 솜씨만 못하고, 읍내 사람들은 유명한 성터나 큰 도시에 있는 공장이 솜씨만 못하며, 유명한 성터나 큰 도시의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최신식의 묘한 기계 제작 솜씨만은 못하다. 


저 궁벽(窮僻)한 시골 마을에 사는 자가 오래 전에 서울에 왔다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아직 완전하지 못한 방법을 우연히 얻어듣고는, 기쁘게 돌아가서 시험해 본 다음, 속으로 자신만만하여 말하기를

"천하에 이 방법보다  더 우수한 것이 없다. "

하면서 아들과 손자들을 모아 놓고 경계하기를


"서울에서 말하는 소위 기예라는 것을 내가 모두 배워 가지고 왔으니, 지금부터는 서울에서도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다. 한다.

이런 사람이 하는 짓이란 거칠고 나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 있는 백공(百工)들의 기예는 모두 옛날 중국에서 배워 온 방식인데, 수백 년 이래 칼로 벤 것처럼 딱 잘라 다시는 중국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중국에는 새로운 방식과 교묘한 제도가 나날이 증가하고 다달이 불어나서 수백 년 이전의 옛날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서로 묻지도 않고 오직 옛날의 방식만을 편케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 게으르단 말인가.


2. 농사짓는 기술이 정교해지면 차지한 농토가 적으면서도 곡식은 소출(所出)이 많으며, 노력이 덜 들면서도 잘 여물 것이다. 밭을 일구어서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낫질하고 벗기는 것으로부터 키질하고 방아 찧고 반죽하고 밥 짓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게 되어 노동력이 절감될 것이다. 


베 짜는 기술이 정교해지면 투입되는 물자가 적으면서도 실이 많이 나오고, 작업을 빨리 하면서도 포백(布帛)은 올이 배고 결이 고울 것이다. 물에 담가서 씻고 실을 뽑으며 베를 짜고 표백하는 일로부터 채색으로 물들이고 바느질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게 되어 노동력이 절감 될 것이다.


병정(兵丁)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공격하고 방어하며 식량을 운반하고 성벽 따위를 수축(修築)하는 모든 일이 속도가 빨라져 위태함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의원(醫員)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맥을 짚어서 증세를 살피고 약의 성질을 분별하여 사시(四時)의 기운을 살피는 모든 것이 옛날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잘못된 점을 논박(論駁)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공 장이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궁실(宮室)과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성곽과 선박, 수레, 가마 따위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고 견고(堅固)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 방법을 다 알아서 힘껏 시행한다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백성을 잘살고 수(壽)하게 할 수 있을 터인데, 당장 익숙히 보면서도 도모하지 않는다.

수레를 사용하는데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하여 사용할 수 없다. " 하며, 양(羊)을 목축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조선에는 양이 없다. " 하며, 말은 죽을 쑤어 주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풍토(風土)가 각기 다르다. " 하니, 이런 자들을 난들 또한 어찌하겠는가.


글씨를 배우는 데 미불(米불)과 동기창(董其昌)의 체를 쓰는 자가 있으면 "왕희지(王羲之)의 순수함만 같지 못하다. " 하며, 벽생백(벽生白)과 장원소(張元素)의 방법을 쓰는 자가 있으면 "단계(丹溪)나 하간(河間)의 옛 법만 같지 못하다. " 하면서, 은연중 빗대어서 성세(聲勢)를 만들어 한 세상을 호령하려고 한다.


저 희지(羲之)와 단계(丹溪), 하간(河間) 등의 무리는 과연 계림국(鷄林國)의 안동부(安東府) 사람들인가.

항간에서 말하는 왕희지의 글씨란, 곧 우리 나라에서 목판에 새긴 필진도(筆陣圖)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리어 미불이나 동기창의 진짜 필적만 못하다.


3 옛날, 소식(蘇軾)은 경적(經籍)을 고려에 하사하지 말고 아울러 구입해 가는 것도 금지하도록 주청(奏請)하면서 "이적(夷狄)이 글을 읽으면 그 지식이 진보될 것이다. " 했으니, 어찌 그리도 마음이 좁고 인정이 적었던가.


그러나 이런 논의가 때로는 중국에 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적도 서로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기능을 배우게 하여 그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을 하겠는가.


옛날에는 외국 오랑캐로서 중국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킨 자가 매우 많았다. 근세에도 유구(琉球) 사람들은 중국의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전문적으로 새로운 문물과 기예를 배웠으며, 일본은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왕래하면서 온갖 공장이 들의 섬세하고 교묘한 기술을 배워 가기를 힘썼다.


이 때문에 유구와 일본은 바다의 한복판인 먼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기능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하여 이웃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타나는 효과가 이처럼 뚜렷하다.


마침 지금은 중국의 규칙이 탁 트여서 좁지 않은데, 이런 기회를 놓쳐 버리고 도모하지 않았다가 만일 하루 아침에 소식과 같은 자가 나와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한계를 엄격히 하여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건의한다면, 비록 예물을 가지고 폐백을 받들어 그 기술의 찌꺼기나마 배우려 하더라도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에 원래 있는 것이며, 성현들의 책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진실로 넓혀서 확충(擴充)하고 잘 실천하여 밝힌다면 예의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게 될 터이니, 이는 참으로 외부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후세 사람들에게 의뢰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온갖 공장이 들의 기능으로 말하면 중국에 가서 나중에 새로 나온 제도를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고 고루한 것을 깨뜨리지 못하여 이익을 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국사를 맡은 자가 마땅히 강구하여야 할 문제이다.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 권 Ⅱ, 논(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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