累卵之危 누란지위
累(묶을 누{루},{벌거벗을 라})
卵(알 란{난})
之(갈 지)
危(위태할 위)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져 깨질 위험한 상태
「사기」의 '범수채택열전(范 蔡澤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나라 범수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부하로 있을 때 수가를 따라 제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가의 미움을 사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을 받아
장록(張祿)이란 이름으로 진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왕계가 진왕에게,
"위나라 장록 선생이란 사람은 천하에 뛰어난 변사입니다."
하고 소개하면서 범수란 사람은 현실을 아래글과 같이 말한다고 부연한다.
진나라는 지금 계란을 쌓아 놓는 것보다 정세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자기를 받아들인다면 진나라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이런 내용을 알릴 길이 없다기에 신이 모시고 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1년 후에 범수는 진왕을 만나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대외 정책만이 진이 육국을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진언하여 진소왕에 의해 재상이 되고 크게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국가존망지추(國家存亡之秋)' 역시 '누란지위'와 비슷한 말이다.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위급한 시기는 언제든지 닥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위급함을 깨닫고 대처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있더라도 나라에서 얼마나 현명하게 잘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조의 이율곡 선생은 그러한 위급함을 깨닫고 10만 양병론을 제시한 현명한 분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1582년(선조 15년) 12월 율곡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국방의 대임을 맡아 노심초사하던 율곡은 이듬해인 1583년 2월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을 '6조계' 란 글로 써 올리면서 국방 강화를 건의하였다.
그는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먼저 준비하여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 라는 옛 말을 인용하면서 여섯 조목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2. 양군민(養軍民) :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3. 족재용(足財用) : 재용(財用)을 풍족히 할 것.
4. 고번병(固藩屛) : 번병(藩屛)78)을 견고히 할 것.
5. 비전마(備戰馬) :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6. 명교화(明敎化) : 교화(敎化)를 밝힐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조정의 반대와 신료들의 무관심 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은 '6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심사숙고한 후 이해 4월 경연석상에서 양병십만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