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뢰 병풍

중국 무이산 구곡시

완 재 2006. 10. 23. 11:04

 

무이산구곡시(10폭 병풍)


 

 

 

★ 武夷山(무 이 산) 구곡시---10폭 병풍 수화재를 예방한다 하여 부적처럼 가장함

 

武夷山上有仙靈 山下寒流曲曲淸 欲識箇中奇絶處 櫂歌閒聽兩三聲

무이산상유선령 산하한류곡곡청 욕식개중기절처 도가한청양삼성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峯影蘸晴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暮煙

일곡계변상조선 만정봉영잠청천홍교 일단무소식 만학천암쇄모연

 

二曲亭亭玉女峰 揷花臨水爲誰容 道人不復荒臺夢 興入前山翠幾重

이곡정정옥여봉 삽화임수위수용 도인불부황대몽 흥입전산취기중

 

三曲君看架壑船 不知停棹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堪自憐

삼곡군간가학선 부지정도기하년 상전해수금여허 포말풍등감자련

 

四曲東西兩石岩 巖花垂露碧(監毛)毿 金鷄叫罷無人見 月滿空山水滿潭

사곡동서양석암 암화수로벽 (람)  금계규파무인견 월만공산수만담

 

五曲山高雲氣深 長時煙雨暗平林 林間有客無人識 欸內聲中萬古心

오곡산고운기심 장시연우암평림 림간유객무인식 애내성중만고심

 

六曲蒼屛繞碧灣 茅茨終日掩柴關 客來倚棹岩花落 猿鳥不驚春意閒

육곡창병요벽만 모자종일엄시관 객래의도암화락 원조불경춘의한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峯頭雨 添得飛泉幾度寒

칠곡이선상벽탄 은병선장갱회간 각련작야봉두우 첨득비천기도한

 

八曲風煙勢欲開 鼓樓嵒下水縈回 莫言此處無佳景 自是遊人不上來

팔곡풍연세욕개 고루암하수영회 막언차처무가경 자시유인불상래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路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구곡장궁안활연 상마우로견평천 어랑갱멱도원로 제시인간별유천

 

欸(한숨쉴 애), 柴(섶 시), 縈(얽힐 영), 豁(뚫린 골 활), 覓(찾을 멱)

茨(가시나무 자), (監毛)(털긴모양람)

 

무이산 위에는 신령이 있고 산아래 찬 시냇물은 굽이굽이 맑구나

이 속에서 빼어난 경치를 찾고자 할진덴 뱃노래 두세 소리 한가로이 들어 보아라

 

첫굽이 시냇가에서 낚시 배에 오르니 만정봉 그림자 갠 내에 잠겼구나,

무지개다리 한번 끊어진 뒤로 소식 없는데 만 골짜기 천개의 바위는 저녁 안개에 잠겨있네

 

둘째 굽이엔 오뚝오뚝 솟은 옥녀봉 꽃을 꽂고 물가에 다다라 누굴 위해 맵시내나

도인은 다시 허황된(신선되는) 꿈꾸지 않으며 흥에 겨워 앞에 드니 푸르름이 몇 겹인가

 

셋째 굽이엔 그대는 골짜기에 걸린 배를 보라. 노를 멈춘지 몇 년이나 되는지 모르겠구나

뿡나무 밭 바다 되는 것 이제 이와 같은데 거품 같고 바람앞 등불 같음에 스스로 가련하다

 

넷째 굽이 동쪽 서쪽 마주보는 두 바위 바위꽃이 이슬을 드리워 푸르름이 늘어졌구나

금계가 울기를 파한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연못에 가득하구나

 

다섯째 굽이 산 높고 구름 깊은 곳에 오랫토록 안개비는 평평한 숲에 어둡다.

숲 사이 나그네 있어도 아는 사람 없고 노젓는 소리 가운데 태고적 마음일세

 

여섯째 굽이 창병에 푸른 물굽이를 둘렀는데 띠집에는 종일 토록 사립문을 닫았구나

손이 와서 배에 기대니 바위에 꽃이 떨어지는데 잔나비와 새는 놀라지 않고 봄 뜻은 한가로워라

 

일곱째 굽이 배를 옮겨 푸른 여울로 거슬러 올라가니 은병선장을 다시 본다.

문득 가련하구나 어젯밤 봉우리에 내린 비가 더하여 폭포를 얼마나 더 차게 만들었는가

 

여덟째 굽이 바람 안개는 세를 펼치려 하고 고루암 아래에는 물이 소용돌이 치네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 놀러 오는 사람이 올라오지 아니하네

 

아홉째 굽이 장차 눈앞이 훤히 트여지는데 비와 이슬에 젖은 뽕과 삼 사이로 평천이 보이누나 고

기잡는 이는 다시 도원의 길을 찾으니 이 인간을 제외한 이곳이 바로 별천지구나

(朱夫子)

 

 

주자 (朱子 ; 1130~1200)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侗)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역사편찬).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 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 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정적(政敵)인 한탁주(韓胄侂)가 그의 학설과 행동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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