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능력 급별 시험문제

[스크랩] 한자의 기원

완 재 2008. 8. 13. 13:18
한자(漢字)의 기원>
1. 한자(漢字)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용된 기억보조수단 - 결승(結繩)과 서계(書契)에 관하여
문자 발명 이전의 인류 문명 초기에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었던 기억 보조 수단으로는 결승(結繩)이나 서계(書契)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결승(結繩)이란?
 
결승(結繩)은 여러 색깔의 끈이나 새끼를 매듭지음으로써 그 색깔과 매듭의 수, 모양, 매듭 사이의 거리 등을 이용하여 일정한 의미를 표시하는 것으로, 인류 문명 초기에 거의 모든 종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데 이용했던 방법이다. 유명하면서도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결승(結繩)으로는 고대 잉카 제국의 페루인들이 사용하던 퀴푸(Quipu)가 있는데, 퀴푸는 ‘매듭’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페루 외에 중국, 티베트, 일본, 시베리아, 아프리카, 캘리포니아, 폴리네시아 제도에서도 결승(結繩)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솔로몬 군도에서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서계(書契)란?
 
서계(書契)에서 서(書)는 ‘쓰다’라는 의미이고 계(契)는 ‘새기다’라는 의미로, 이는 막대기나 나무봉에 틈이나 홈을 파서 어떤 물건의 수량이나 개념, 약속, 사건을 표시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 부절(符節)이라고도 한다. 이 부절(符節)은 주로 두 사람 사이의 금전적인 거래가 있을 때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하나의 막대기에 눈금을 표시한 후 그것을 세로로 쪼개면 빌린 사람이나 빌려준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수량이 표시되므로 두 사람이 거래한 내용을 확인하는데 유용한 방법이었다. 이 역시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결승(結繩)이나 서계(書契)가 문자 혹은 문자의 기원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승(結繩)과 서계(書契)를 문자, 혹은 문자의 기원으로 여겼던 중국인들의 생각은 단순한 의사 전달 수단과 문자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착각이다. 무엇보다도 문자란 한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형체와 의미, 독음, 즉 형음의(形音義)라는 세가지 요소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승(結繩)이나 서계(書契)는 추상적인 부호 형태와 고유한 독음, 특정한 의미라는 문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어렵고, 또 한 두 사람이나 특정 지역 내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수는 있어도 후대나 다른 지역으로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하므로, 시공간의 제한 없이 의사를 전달하고 기억을 저장하는 문자의 역할을 해냈다고도 볼 수 없다. 특히 결승(結繩)은 실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더더욱 문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자(漢字)가 만들어지기 이전, 전세계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기억을 보존하고 부분적이나마 의사를 전달해주는데 유용하게 사용된 방법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2.

창힐()은 누구인가? (한자는 창힐이 만들었다?)
한자(漢字)의 창조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어디에서나 꼭 등장하는 창힐()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황제 때의 사관(史官)이라고도 하고 고대의 제왕이었다고도 하는데, 중국의 각종 기록에서는 눈이 네 개 혹은 여섯 개였다고 하며, 그 많은 눈으로 윗쪽으로는 해와 달, 별자리의 운행을 관찰하고, 아래쪽으로는 지상의 날짐승, 길짐승 등 각종 동물의 동태를 파악한 후 그것에 근거하여 한자를 창조했다고 전해져 왔다.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나?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조자설(造字說)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문헌 기록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도문(陶文)이나 갑골문(甲骨文)처럼 한자(漢字)의 초기 단계를 연구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고, 언어와 문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 창힐조자설(造字說)은 이제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을 뿐이다.

문자란 본래 한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사실은 갑골문(甲骨文)으로도 증명된다. 갑골문(甲骨文)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글자를 여러가지 다양한 형체로 쓰고 있는데, 만약 문자를 어떤 한 사람이 만들었다면 한 글자를 그렇게 다양한 형태로 썼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여러 중국 고서(古書)에 기록되어 후대로 전해져 온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창힐()이 한자(漢字)를 만든 것은 아니더라도, 만들어진 한자(漢字)를 정리하여 규범화하거나 보급하는
데 일조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창힐()의 실존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 모든 것은 추측으로 남아 있을 뿐이
다.

 

 

 

3. 한자(漢字)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漢字)는 갑골문(甲骨文)인가? - 도문(陶文)에 관하여  
3.1 도문(陶文)
도문(陶文)이란?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된 이후 학계에서 갑골문(甲骨文)은 한자(漢字) 자형 중 가장 오래된 형태로 인정받긴 했으나, 갑골문(甲骨文)의 글자수가 상당히 많고, 복잡한 자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일련의 어법 구조까지 지니고 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처럼 성숙한 문자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갑골문(甲骨文)이 사용되기 이전 상당기간 문자가 발전해 왔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에서 문자로 볼 수 있는 기호들이 발견되면서, 그 추정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것들은 도기에 새겨진 문자라는 의미에서 도문(陶文)이라 불리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신석기 중기 앙소문화(仰韶文化)에 속하는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반파(半坡) 지역의 도문(陶文)과 임동현(臨潼縣) 강채(姜寨) 지역의 도문(陶文)이 있고, 다음으로 신석기 후기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 속하는 산동성(山東省) 태안현
(泰安縣) 대문구(大汶口) 지역의 도문(陶文), 거현() 능양하(陵陽河)
지역의 도문, 제성현(諸城縣) 전채(前寨) 지역의 도문 등이 있으며, 역시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지인 산동성(山東省)
<반파도문(半坡陶文)>
장구현(長丘顯) 성자애(城子崖)에서도 도문이 발견되었다. 또한 그 이후 시기인 상대(商代)의 것으로 밝혀진 도문(陶文)도 다수 출토되었다.
 
상대(商代)는 이미 갑골문(甲骨文)이 사용된 시기인데다가 상대(商代)의 도문(陶文) 중에는 갑골문(甲骨文)과 자형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상대(商代) 이후의 도문(陶文)에 대해서는 문자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 이전 시기인 신석기 중기와 후기의 도문(陶文)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도문(陶文)을 문자로 보지 않는 견해와 문자로 보는 견해, 또 도문(陶文)을 문자로 보더라도 신석기 중기의 도문(陶文)은 문자로 보지 않고 신석기 후기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문(陶文)은 문자로 보는 견해 등, 아직까지도 이견(異見)이 남아 있다.
<대문구도문(大汶口陶文)>▶

 

 

 

 

 


출처 : 들꽃 향기
글쓴이 : 세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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