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水落石出(수락석출)
水:물 수,
落:떨어질 락,
石:돌 석,
出:날 출]
물이 빠지니 돌이 드러남.
곧 흑막이 걷히고 진상이 드러남
물이 빠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다.
원래는 물가의 겨울 경치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후에는 어떤 사건의 진상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丁酉年花春之節墨硏齋南窓下玩齋卽席撫毫
정유년화춘지절묵연재남창하완재즉석무호
정유년 꽃피는 계절 묵연재 남쪽 창아래서
완재가 즉석에서 쓰다
구양수(1007∼1073)가 〈취옹정기〉를 쓴 것은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6년, 즉 1046년이고, 소식(1037∼1101)이 〈전적벽부〉와 〈후적벽부〉를 쓴 것은 각각 신종(神宗) 원풍(元豊) 5년, 즉 1082년의 7월과 10월이다. 연대순으로 보면 ‘수락석출’의 출전은 구양수의 〈취옹정기〉라고 해야 옳겠지만, 대부분의 공구서에서는 그 출전을 소식의 〈후적벽부〉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소식의 〈적벽부〉가 구양수의 〈취옹정기〉보다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北宋(북송)의 神宗(신종)은 약해해진 국가를 바로 잡을 생각으로 王安石(왕안석)을 등용해 과감한 개혁 정책을 폈다.
유명한 '王安石의 變法(변법)'이다. 이 때 歐陽修(구양수)와 함께 反旗(반기)를 든 사람이 蘇東坡(소동파-蘇軾·소식)였다.
그는 王安石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神宗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王安石에게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귀양을 가고 만다.
그가 左遷(좌천)돼 간 곳은 湖北省 黃州(호북성 황주)의 東坡(동파)라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蘇東坡(소동파)라 부르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틈만 나면 주위의 名勝(명승)을 찾아 유람했다.
한번은 赤壁(적벽)을 찾았다. 유명한 赤壁賦(적벽부)는 여기서 나왔다.
본디 赤壁이라면 孫權(손권)의 吳(오)와 劉備(유비)의 蜀(촉)이 연합해
曹操(조조)의 백만대군을 격파했던 곳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찾은 赤壁은 격전지로서의 赤壁(嘉魚縣 소재)이 아니라 黃州의 赤壁이었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쓴 赤壁賦는 前後 두 편이 있는데, 後赤壁賦(후적벽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산은 높고 달은 기울었으며, 물이 빠지니 돌이 드러나는구나(山高月小 水落石出)"
그렇다. 호수나 강의 물이 빠지고 나면 그 속에 있던 돌은 赤裸裸(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마치 안개가 걷히고 나면 우뚝 솟은 산이 雄姿(웅자)를 드러내는 것처럼.
늦가을 어느 날 물 빠진 강의 모습을 보고 읊은 것을 후세 사람들은 흑막에 가려져 있던 진상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水落石出에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