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자 서예

사(선비)

완 재 2022. 1. 27. 10:42

 

士(사) 선비

 

夫士生於世  부사생어세

或出  혹출

或處  혹처

或遇  혹우

或不遇  혹불우

歸潔其身行其義而  귀결기신행기의이

已禍福非所論也  이화복비소론야

 

선비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혹은 세상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혹은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 귀결은 몸을 깨끗이 하고 의를 행할 뿐이요

화복은 논할바가 아니다.

-奇大升 高峯集-

 

한국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학식있는 사람'을 말한다.

선인들은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의 무소유의 덕을 요구했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뜻 있는 사()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장자도 ()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사()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조를 꼽았다.

 

이렇게 사()가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의 선비가 지닌 성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는 역사 속에서 신분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사대부(士大夫), 사군자(士君子), 사서인(士庶人) 등으로 쓰였던 것이 그 예다.

 

2세기 말엽인 고구려 고국천왕 때 을파소는 은둔하여 밭갈이를 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고 선비의 도리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선비의 개념은 신분을 뜻하기보다는 인격의 관념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2(372)에 태학이 세워졌다. 여기서는 유교 이념을 교육하면서 선비를 양성하였다.

박사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는데, 이 박사제도는 경전에 관한 전문 지식인을 키워냈다.

백제와 신라에서도 각각 태학과 국학이 세워졌다. 당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였다.

 

고려 시대에는 교육제도가 한층 정비되어 국자감을 비롯해 지방의 12목에까지 박사를 두어 인재를 양성했다.

과거 제도가 정립돼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고려 말엽 충렬왕 때 안향 등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이른바 도학 이념이 정립되었다.

도학 이념을 중심으로 선비들의 자각도 한층 깊어졌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 이념을 국가 통치 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 이념의 담당자로서 그 존재 가치가 뚜렷해졌다. 조선 초 선비들은 고려 말에 절개를 잃지 않았던 정몽주를 추종하였고, 조선 왕조에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 정신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 왕조 건국기에 혁명 세력을 중심으로 고위 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파와 대비를 이뤘다.

이들은 절의를 존중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로 구분했다.

이때부터 훈구파와 사림파의 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사화(士禍)’라고 한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 시대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그에 따라 선비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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