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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완 재 2013. 10. 4. 11:38



0, 무아(無我)의 의미와 삶의 주체 

 

흔히 무아(無我)에 대해 말하면 "내가 없다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단 말인가?"라는 반문이 뒤따릅니다.

무아를 잘못 이해하면 '나'란 없기 때문에 바르게 살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할 필요도 없으며, 남을 괴롭혀도 그들도 무아이므로 상관없다는 궤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교에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행위의 주체로써의 나',

'삶의 주체로써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나'는 내가 의지해야 할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아의 참뜻은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緣起-인연)의 산물입니다. 삼법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가 아니다[非我]'라고 합니다. 나는 나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死] 과정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내 자신을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부처님은 나는 '내가 아닌 것[非我]'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독자적 실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그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물[水]에서 왔으며, 체온은 불[火]에서 왔으며, 활동성은 바람[風]에서 왔으며, 피부와 머리카락은 땅[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산이고 대지이며 강물이고 우주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닌 타자들이 인연(因緣)을 매개로 잠시 모여있는 오온(五蘊)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독자적 실체가 없고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용수(龍樹)는 {중론}에서 연기와 공의 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연으로 생긴 법들(因緣所生法) 나는 그것을 공이라고 설한다(我說卽是空). 또 이것을 거짓 이름이라고 한다(亦爲是假名). 이것이 중도의 뜻이다(亦是中道義)."라고 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으로 존재하는데 '나'라는 존재도 바로 그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체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있기 때문에 독자적 실체성은 공(空)하며, '나'라는 존재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인연의 산물에 대해 '인간', '동물', '무정물'과 같은 거짓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아를 설하는 것은 '내가 없다'라는 '나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자의 현전(現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아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내가 바로 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없어지는 것은 내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아상(我相)의 울타리입니다. 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협소한 자기인식을 벗어버리고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설은 '나'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자기, 우주적 자아를 깨닫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업(業)의 주체가 없다거나, 삶을 계획하는 창조적 행위와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써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유훈으로 남기고 계십니다. {법구경}에서도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이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나이며, 나를 통제하고 미래의 올바른 삶을 빚어내는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고해(苦海)에서 나를 구해주는 섬[洲]이라고 했습니다. 즉 장아함 [유행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주(洲)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말고 머물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욕망[貪]·분노[瞋]·어리석음[癡]과 같은 삼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상에서 오직 스스로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는 길입니다. 


불교는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섬'을 찾고 개발하는 종교입니다.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교를 자력문(自力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아설은 자아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며 이를 통해 참다운 자기를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 같은 오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고립적 개체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존재의 보편적 관계성과 공존을 성찰하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라'거나, '자기를 망각하라'는 등의 가르침을 위해 무아를 설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아상(我相)에 물든 삶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것이지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무아설은 창조적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업과 행위의 주체로써 나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과 그에 따르는 결과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삼독을 거슬러 수행할 수 있고 그 결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Mani불교



어떻게 나가 없다는 無我와 진정한 나가 있다는 我를 동시에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無我를 가르치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즈음에는

 다시 '나'라는 관념을 열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가 없다는 것과 '나'가 있다는 정반대의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겠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을 직접 들어보자. 네가 중요한 것을 물었다.


 내가 이제 비유로써 너에게 일러 주리라.

  어느 나라의 국왕 밑에 한 엉터리 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는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느니라. 그 의사는 누가 아프다고 하면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므로 무조건 우유로 만든 약을 썼는니라. 

그 의사가 병을 진찰한다고 해도 다른 수는 없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의사는 아무 병에나 우유약을 쓰기 때문 이니라.

 그 나라의 왕도 그 의사의 약쓰는 법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러던 중

 한 지혜로운 양의가 왕을 만날 기회가 있었느니라. 

새의사는

 모든 병에 우유로 돤 약을 똑 같이 쓰는 것은 옳지 않음을 설명하였느니라.

 왕이 들어보니

새의사의 말이 옳은 것은 같았느니라.

왕은 먼저 의사를 파면 하고 새의사를 채용함과 동시에

전국에 엉터리의사를 파면하고 새의사를 채용함과 동시에

전국에 엉터리 의사가 조제한 우유로 된 약을 모두 폐기하도록 명령하였느니라.

새 의사는

 그 후로

가지가지 좋은 약을 조제하여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느니라.

 국왕의 병세를 진찰해 본 새의사는

이 병은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된다고 국왕에게 말했느니라.

국왕은 어이가 없었느니라.

새의사 자신이 엉터리 의사의 조제법으로 만든 우유약은 잘못 되었으니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말해놓고 이제와 서 왕자신이 병이 들었는데 다시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느니라.

"네가 미쳤느냐,

정신이 빠졌느냐?

아니면 나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냐?

 그전에는 우유로 만든 약을 쓰면 안 된다고 하더니 우유로 만든 약이라야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국왕이시여,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다가 글자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벌레는 그 것이 글자인 줄을 모릅니다.

대왕이시여, 그전 의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병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우유로 만든 약만 먹게하여 그 약이 듣는지, 아니 듣는지도 모릅니다.

 벌레가 자신이 파놓은 글자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유로 쓰는 약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약도 되고 양약도 됩니다.

대왕의 병에는 이 우유로 만든 약이 필요합니다.

 왕은 새 의사의 말대로 우유로 조제한 약을 먹고 병이 나았느니라. 비구들아

모든 엉터리 의원을 항복받고 중생을 조복하여 무아의 도리를 설하였느니라.

 범부의 마음과 외도의 마음이 만드는 '나'는 벌레가 만드는 글자와 같아서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 이니라.

 나는

 저 어진 의원이 우유가 해가 될 때와 약이 될 때를 알아서 우유를 쓰는 것과 같이

나라는 我가 해가 될 때와 이익이 될 때를 알아서 '나'를 설하는 것이니라.

 범부와 외도는 '나'라고 하는 것을 손가락이나 겨자씨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내가 無我라고 하느니라. 그러나 진정한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만일 깨달음의 法으로서 진실로 상주하고 자재불변(自在不變)하여 있다면 이것은 나라고 이름할 것이니라 .

                                                                               출처 : 다음넷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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