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風蘿月 송풍라월
松風蘿月 송풍라월
松(소나무 송)
風(바람 풍)
蘿(무 라{나} 담장이풀{나})
月(달 월)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고 댕댕이 담장에 달이 비추인다
백두산 북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도백하 마을밖에는 유람객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미인송숲 - 송풍라월이 있다.
먼 옛날, 이곳에서는 송풍이라고 부르는 의젓하고도 일 잘하는 총각과 라월이라고 부르는 어여쁘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까이 보내던 그들은 춘삼월 대보름날 백하강 기슭에서 서로 만나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들은 돌위에 물을 떠놓고 달님께 절을 올리며 백발이 되어도 먹은 마음 변하지 않고 원앙새 처럼 살겠노라고 굳게 맹세하였다.
그런데 마을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부락장이 나다니다가 라월이라는 처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매파를 띄웠다.
"이 몸은 이미 이름지은 곳이 있으니 아예 이런 말씀을 꺼내지 마세요." 매파한테 라월의 이런 대답을 받아들은 부락장은 앙앙거렸다.
"어느 놈이 내 먼저 챘더냐?"
"그와 이웃으로 사는 송풍이옵니다."
"송풍, 하하하..."
부락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여색에 눈이 어두운 부락장은 한번 먹은 마음을 굽히는 때가 없었다. 그는 송풍과 라월이 사이를 벌려놓고 라월이를 첩으로 만들리라 마음먹었다. 이튿날 부락장은 한무리 졸개들을 거느리고 송풍이네 집을 찾아갔다.
"송풍이 있느냐?"
"예이!" 송풍이는 맨발바람으로 밖으로 나왔다.
"민부를 뽑는데 네가 가야겠다."
"아니..."
"무슨 잔소리냐?"
"소인이 가면 늙은 어머니는 누가..."
"내일 당장 떠나거라. 1년이야 1년!"
부락장은 발을 탕탕 구르고 떠나갔다.
"부락장님, 사정을 좀 봐주사이다!"
"제길! 시끄럽게 굴지 말아. 비켜!"
앞길을 막으며 애원하는 송풍이를 보는체도 하지 않고 부락장은 사라졌다. 어두운 밤에 홍두깨에 얻어맞은 듯이 송풍은 뻥해서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소쩍새가 "소쩍, 소쩍"하고 피타게 울어대였다. 송풍과 라월이는 언약을 맺던 강가에서 만났다. 언제나 달콤한 꿈과 행복만을 안겨주던 강가였건만 오늘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따금 썰렁한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송풍이는 라월이에게 부역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라월이는 짚이는 바가 있는지라 입술을 깨물었다.
"내 가난하다보니 라월이가 속태우게 되었소." 이 말은 송풍의 저주에 찬 부르짖음이었고 라월에 대한 송풍의 미안한 마음이었다. "이건 다 부락장의 음험한 장난이예요. 난 죽더라도 그대만을 기다리겠어요. 안심하고 가셨다가 몸 성히 돌아오세요." 라월이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자신의 일편단심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세상은 왜 이리도 무정하고 우리 운명은 왜 이리도 기구하오." 하고 송풍이는 한탄하였다. 송풍이를 슬픔과 비애만 안고 가게 할 수 없는 라월이는 눈물을 닦고 얼굴에 밝은 웃음을 띄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대요. 일년후에 그대가 돌아오면 우린 꼭 함께 살림을 꾸리자구요."
설움에 찬 제 가슴을 달래며 길 떠나는 사람에게 슬픔은 안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라월의 마음을 누가 모르랴.
송풍이는 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라월이!" 송풍은 라월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치 누가 라월이를 빼앗아갈까봐 두려운 듯이,
"이승에서 같이 못살면 저승에 가서라도 함께 살 거예요. 근심말고 다녀오세요." "난 굳게 믿겠소!"
송풍은 라월의 어깨를 쓰다듬었고 라월이는 도란도란 속삭이었다. "우린 달이 둥근 날 언약을 맺었어요.
거기 가서 달이 둥글면 나를 본 듯하세요. 난 달이 둥글면 그대 온 줄 알겠어요." "사람들은 달이 거울처럼 밝다는데 둥근달이 거울이면 얼마나 좋겠소. 그대 얼굴 달에 비치면 내가 보고 내 얼굴 달에 비치면 그대가 보고."
"꼭 그렇게 보일거얘요." 송풍이 민부로 끌려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락장은 매파를 내세웠다.
"라월이, 부락장의 애첩이 돼봐유. 돈이 있겠다, 권세가 있겠다. 얼마나 뜨르르하겠소."
"돈도, 권세도 다 싫어요. 썩 물러가요."
"해해... 깊이 생각해보라니깐. 괜히 욕을 보지 말구."
라월이는 매파를 표독스럽게 쏘아보았다. 당장 큰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았다. 매파는 혀를 더 놀리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슬슬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나으리님, 이 일은 천천히 도모해야겠나이다. 소뿔도 아닌걸 어떻게 단김에 빼겠나이까!"
"속에 불이 일어. 그래 희망이 있더냐?"
"해해... 열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어데 있나이까. 차츰 되겠지유." 매파는 눈을 껌뻑하였다. 부락장은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파는 능글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급히 먹는 밥에 목이 멘다고 했어유." "음." 매파를 그 알랑거리는 혀로 끝내 부락장을 누그러들게 하였다. 일년이 지나서 다른 마을 민부들은 다 돌아왔으나 송풍이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간장 태우며 기다리던 라월이는 철부지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억울하고 분했으나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송풍이가 성을 쌓다가 돌에 치워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인 죽을 수 없어. 그인 꼭 돌아올거야." 라월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되뇌었다. 매파는 하루에도 두세차례 찾아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락장의 첩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였다. 죽은 사람을 눈이 빠져서 기다리겠느냐, 아까운 청춘을 버리겠느냐, 부귀영화를 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꼬아대였다. 라월이는 매파가 점점 더 징글스러워나고 구역질이 났다. "보기 싫어요! 듣기 싫어요! 썩 물러가요!"하고 벌이 쏘듯 쏘아주었다. 그리고 매파를 향하여 빗자루며 목침이며를 닥치는대로 집어던졌다. 그제야 매파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일은 사납게만 번져갔다. 참다 못하여 악이 난 부락장은 한무리 졸개들을 보냈다. "부락장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하겠거든 당장 빚을 물어, 빚을 물지 않으면 종으로 잡아가겠어." 라월이는 더는 배기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시간이나 늦추려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비천한 몸이 오나 두 낭군을 섬길 수 없사오니 좀 더 기다려주소이다."
"그래 송풍이 안오면 가겠느냐?"
"송풍이 정말 죽었으면 가겠나이다."
"미친년!"
졸개들이 돌아간 후 라월이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송풍이 살아와서 자기를 그리며 눈물 지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여 죽을 수도 없었다. 부락장의 등살에 시달리며 이핑게저핑게로 석 달이나 더 끌었건만 송풍은 그냥 소식이 없었다. 부락장의 졸개들이 이번에는 바오라기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은 애첩이 되겠느냐 종이 되겠느냐? 애첩이 되겠다면 가마에 실어가고 종이 되겠다면 묶어가겠다."
라월이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오늘밤 송풍의 제를 지내고 내일 아침에 떠나겠사오니 꽃가마를 가지고 와주세요."
졸개들은 입이 헤벌쭉해서 돌아갔다. 그날 밤은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밤이었다. 라월이는 새옷을 갈아입고 송풍이와 언약을 맺던 강변으로 나갔다. 그는 송풍이와 이별하던 곳에 가서 바위돌 위에 물 한사발을 떠놓고 절을 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우리네 연분을 저승에 가서라도 소원대로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라월이는 머리를 들고 달을 바라보다가 백하수에 몸을 던졌다. 백하수도 구슬프게 울며 보드라운 모래와 흙을 실어다가 라월의 시체를 봉긋하게 묻어주고는 물길을 돌렸다. 3년후에 민부의 고역에서 해방받은 송풍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그에게 기쁨대신 고통만 안겨주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나월이도 영원히 갔다.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내 운명은 이리도 기구하냐?
하늘아! 땅아! 말해보아라! 그가 이렇게 외쳐도 하늘도 땅도 대답이 없었다.
라월의 비극이 그에게 준 타격은 자못 컸다. 그는 휘청휘청 백하수 강변으로 걸었다. 라월이와 함께 거닐던 아름다운 강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에게 뼈저린 슬픔만 안겨주었다. 마을사람들이 알려주던대로 송풍이는 라월이를 찾아갔다.무덤 위에는 미인송 한 대가 자라고 있었다. 연두색 잎들이 다보록이 피어난 미인송은 추억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송풍은 그 미인송을 안고 쓰다듬으며 통곡하였다.
"라월이 어데 있소? 왜 나를 두고는 혼자 갔소!" 한 바탕 울고난 송풍이는 이를 악물었다. "나의 행복을 짓밟은 자를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부락장네 집에 곧추 들어가서 불을 질렀다. 화광이 충천하자 송풍이는 앙천대소하면서 라월의 묘지로 돌아왔다. "라월이! 나의 라월이!" 하고 부르며 미인송을 끌어안던 송풍이는 붉은 피를 왈칵 토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시체로부터 뽀얀 안개가 일었다. 안개는 미인송을 감싸고 빙빙 돌다가 구중천으로 서서히 피어 올라갔다. 그것은 송풍의 넋과 라월이 넋이 함께 천당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후부터 미인송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열매가 익자 씨앗들은 바람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미인송들은 수려한 수림을 형성하였다. 후에 이 고장 사람들은 송풍과 라월의 미덕을 찬미하면서 이 미인송숲을 송풍라월이라고 불렀다. 바로 지금의 이도백하에 있는 미인송숲이 송풍라월이다.